‘백인 보수층’의 분노 철저히 대변…공화당 주류정치에 대항막말·좌충우돌 행보로 논란의 중심…본선경쟁력 회의론 거세
지난 1일(현지시간)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예기치 못한 ‘일격’을 당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일주일 만에 대반전의 기회를 거머쥐었다.대선 레이스의 2차 관문인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압도적 선두로 치고 나온 것이다. 트럼프로서는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테드 크루즈에게 패배를 당한 ‘불명예’를 회복하고 대세론에 불을 붙일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트럼프의 이번 승리는 ‘아웃사이더 돌풍’으로 대변되는 미국 정치 기층의 변화 움직임을 반영하고 있다는 데에 선거 전문가들은 주목하고 있다. 공화당 주류 정치의 틀을 흔드는 ‘트럼프 현상’이 더는 일시적 광풍이 아니라 분명한 ‘정치적 실체’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줬다는 평가에서다.
특히 트럼프는 뉴햄프셔를 넘어 미국 거의 모든 주에서 고르게 선두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주도권이 쉽사리 약화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뉴햄프셔는 백인 유권자가 90%를 웃도는 지역이라는 점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미국 유권자의 60∼70%를 차지하는 백인들의 표심을 상당 부분 얻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어 트럼프의 지지 기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워싱턴의 ‘기득권 정치’를 대변하는 공화당 주류에 대한 일반 유권자들의 불신과 함께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이민·의료개혁 드라이브에 상실감과 답답함을 느껴온 백인 보수층의 분노가 트럼프에 대한 지지로 쏠리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과 멕시코 등으로부터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는 블루칼라(근로자) 계층의 상대적 박탈감과 불만도 트럼프 지지세의 동력이 되고 있다.
트럼프는 불과 7개월 전만 해도 유명 부동산 재벌이기는 했지만, 정치에는 문외한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트럼프는 지난해 6월 대선 출마를 선언하는 순간부터 철저하게 기성 정치의 틀을 파괴하는 ‘정계의 이단아’로 변신했다.
막말과 기행, 좌충우돌 행보로 ‘노이즈 마케팅’을 일으키면서 자신을 지지하는 백인 보수층의 속을 시원하게 긁어주고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전력투구해왔다. 백인들이 내심 굴뚝같이 하고 싶었던 말이나 공개로 하기 어려웠던 말을 대신해주면서 ‘정치적 대리 만족’을 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것이 그동안 트럼프가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놓치지 않게 한 힘의 원천이 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는 방송 출연과 유세 과정에서 무지와 몰상식, 인종·성(性) 차별주의적 경향이 드러나는 부적절한 언행을 보여 대선 후보로서의 적격성에 근본적 의문이 제기되고 있고 이 때문에 주류 정치와 언론으로부터 경멸과 조롱을 받기도 했다.
출마 일성부터가 막말이었다. 멕시코 불법이민자들을 ‘마약범’이나 ‘강간범’에 비유하며 이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베트남전 참전용사인 존 매케인(공화·애리조나) 상원의원을 향해 “전쟁포로여서 영웅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고 조롱하는가 하면, 린지 그레이엄(공화·사우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의 휴대전화번호를 방송에서 공개해버리는 기행을 보였다.
지난해 8월 공화당 대선 후보 첫 TV토론을 진행했던 폭스뉴스 여성앵커 메긴 켈리에게는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녀의 어딘가에서도 피가 나오고 있었을 것”이라고 성차별적인 발언을 했다. 급기야 지난해에는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2008년 민주당 대선 경선 때 버락 오바마 후보에게 패한 사실을 거론하며 “힐러리가 이길 판이었는데, 오바마에 의해 ‘X됐다’(got schlonged)”는 비속어를 쓰기도 했다.
한국을 향해서는 일본, 독일과 함께 ‘안보 무임승차론’을 꺼내 들어 논란을 빚었다. 지난해 10월 한국이 매년 1조 원 가까이 부담하는 주한미군 주둔비용 부담액을 ‘푼돈’에 비유했다가 한국계 하버드대생으로부터 송곳 추궁을 받기도 했다.
물론 이 같은 부적절한 언행이 트럼프의 행보를 통해 정치적 대리만족을 느끼는 보수지지층에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트럼프의 이 같은 부상에 공화당 지도부를 비롯한 당의 주류는 여전히 마뜩찮아 하는 분위기다. 트럼프의 ‘본선경쟁력’에 대한 회의론이 자리하고 있다.
트럼프의 이 같은 스타일이 경선과정에서 ‘집토끼’(보수지지층)에게는 통할 수 있지만, 본선과정에서는 ‘산토끼’(무당파·민주당 지지층)에게는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공산이 매우 크다는 게 공화당 주류의 고민이다.
당장 무슬림과 히스패닉계, 흑인 등 소수인종이 등을 돌리고 있고 미 주류 언론과도 적대적 내지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다. 이는 대선뿐만 아니라 동시에 치러지는 상·하원 선거에도 치명적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상황에 따라 당 지도부가 후보선출에 개입하는 ‘중재 전당대회’(brokered convention) 시나리오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런 상황을 의식한 듯 트럼프는 이번 뉴햄프셔 경선을 앞두고는 기존의 안하무인식 언행을 뚜렷이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트럼프는 1946년 뉴욕 퀸즈에서 독일계 이민자의 후손으로 부동산 중견사업가였던 프레드 트럼프와 스코틀랜드 태생인 모친 사이에서 3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이비리그에 속한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을 나온 트럼프는 베트남 전쟁 당시 부동산에 손을 대기 시작해 지금은 전 세계의 호텔과 고급 콘도미니엄을 운영하는 ‘트럼프 그룹’을 이끄는 최고 경영자다.
그는 출마 당시 100억 달러(한화 약 12조 원) 이상의 자산을 갖고 주장했으나,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45억 달러(재계순위 121위)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연방 선거관리위원회(FEC)에 따르면 트럼프는 미국을 비롯해 중국, 카타르를 비롯한 전 세계 각지에 법인을 두고 있으며 515개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수입원은 168개나 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트럼프가 청중의 ‘코드’를 읽고 거침없는 언변을 쏟아내는 트럼프의 유세 스타일은 그의 독특한 이력에 터잡고 있다. 부동산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한 재벌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엔터테이너의 기질이 강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NBC 유니버설을 NBC와 공동 소유하여 TV쇼 ‘어프렌티스’를 진행한 것이 단적인 예다. 영화 ‘나홀로 집에’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1996년 미스 유니버스 조직회를 인수 받아 매년 미스 유니버스와 미스 USA, 미스 틴 USA 대회를 열어왔다가 지난해 대선 출마 이후 멕시코 이민자들에게 막말한 것이 논란이 돼 결국 사업을 매각했다. 1988년에는 미국프로레슬링 WWE의 공식후원을 하다가 급기야 2007년에는 직접 출연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의 ‘쇼맨십’이 방송 출연과 선거유세 과정에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