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수사터 출토 금동약사여래입상](https://img.seoul.co.kr/img/upload/2015/09/21/SSI_20150921092404_O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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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수사터 출토 금동약사여래입상
![숙수사터 당간지주](https://img.seoul.co.kr/img/upload/2015/09/21/SSI_20150921092616_O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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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수사터 당간지주
당시 학교측은 학생을 동원해 불상들을 발굴했다고 한다. 당시 문화재 관리 주무부처였던 문교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현지조사와 동시에 유물을 인수하는 임무를 맡겼다. 이듬해 3월 김원룡 당시 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이 현장에 파견됐다.
![숙수사터 출토 금동약사여래입상](https://img.seoul.co.kr/img/upload/2015/09/21/SSI_20150921092446_O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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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수사터 출토 금동약사여래입상
![숙수사터 금동여래좌상](https://img.seoul.co.kr/img/upload/2015/09/21/SSI_20150921092744_O2.jpg)
![숙수사터 금동여래좌상](https://img.seoul.co.kr//img/upload/2015/09/21/SSI_20150921092744.jpg)
숙수사터 금동여래좌상
통일신라시대 이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대형 토기의 존재는 불상이 묻힌 시기를 짐작케 해준다. 당시 김원룡 연구관도 불상은 고의로 매몰한 것 같고, 따라서 스님들이 전란을 피하여 불상을 파묻고 사찰을 비운 것이 아니었겠느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소수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1495~1554)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순흥 출신의 유학자 안향(1243~1306)을 모시는 사묘(祠廟)를 세우고 신비들이 공부하는 장소로 삼았다가 중종 38년(1543)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수소서원 전경](https://img.seoul.co.kr/img/upload/2015/09/21/SSI_20150921092814_O2.jpg)
![수소서원 전경](https://img.seoul.co.kr//img/upload/2015/09/21/SSI_20150921092814.jpg)
수소서원 전경
김재원 박사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과 연관지었다. 당시 대구 부인사 대장경과 경주 황룡사 9층탑에 불탔다. 특히 고종 41년(1254) 자랄타이가 대군을 이끌고 몰려왔을 때는 사로잡힌 사람이 20만명에 사망자는 헤아릴 수 없었다. 숙수사도 이 때 불타고, 스님들도 모두 죽거나 잡혀가 훗날 불상을 수습할 사람조차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서동철 수석논설위원 dcsuh@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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