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란화 ‘불이선란’ 시문 새로운 해석
추사난화/이성현 지음/들녘/472쪽/3만 5000원
![동양화가 이성현은 추사 김정희의 묵난화 ‘불이선란’에 적힌 화제(畵題) 분석을 통해 현대 미술사가들의 해설을 뒤집는다. 예를 들면 난화 왼쪽에 있는 화제 중 ‘시위달준방필’(始爲達俊放筆ㆍ원 안)로 봐 왔던 몇몇 연구자들을 꼬집으면서 ‘갈 준’(?)자를 ‘준걸 준’(俊)자로, ‘왕비 비’(妃)를 ‘시작할 시’(始)로 읽은 탓에 엉뚱한 해석을 내놓았다고 지적한다. 들녘 제공](https://img.seoul.co.kr/img/upload/2018/02/23/SSI_20180223175724_O2.jpg)
들녘 제공
![동양화가 이성현은 추사 김정희의 묵난화 ‘불이선란’에 적힌 화제(畵題) 분석을 통해 현대 미술사가들의 해설을 뒤집는다. 예를 들면 난화 왼쪽에 있는 화제 중 ‘시위달준방필’(始爲達俊放筆ㆍ원 안)로 봐 왔던 몇몇 연구자들을 꼬집으면서 ‘갈 준’(?)자를 ‘준걸 준’(俊)자로, ‘왕비 비’(妃)를 ‘시작할 시’(始)로 읽은 탓에 엉뚱한 해석을 내놓았다고 지적한다. 들녘 제공](https://img.seoul.co.kr//img/upload/2018/02/23/SSI_20180223175724.jpg)
동양화가 이성현은 추사 김정희의 묵난화 ‘불이선란’에 적힌 화제(畵題) 분석을 통해 현대 미술사가들의 해설을 뒤집는다. 예를 들면 난화 왼쪽에 있는 화제 중 ‘시위달준방필’(始爲達俊放筆ㆍ원 안)로 봐 왔던 몇몇 연구자들을 꼬집으면서 ‘갈 준’(?)자를 ‘준걸 준’(俊)자로, ‘왕비 비’(妃)를 ‘시작할 시’(始)로 읽은 탓에 엉뚱한 해석을 내놓았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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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추사의 난화 중에서도 ‘불이선란’ 분석에 공을 들인다. 난화의 위쪽에 기록된 화제는 ‘부작난화이십년’(不作蘭畵二十年)으로 시작된다고 알려져 있다. ‘난초 꽃을 그리지 않은 지 20년 만에’ 정도로 해석된다. 저자는 거칠게 휘갈겨 쓴 추사의 이 화제에서 미술사가들이 ‘작’(作)이라고 본 부분은 ‘정’(正)자를 오독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법도에 맞지 않는) 엉터리 난 그림과 함께한 지 20년 만에’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것. 첫 부분부터 작품을 어긋나게 바라본 탓에 ‘불이선란’을 둘러싼 엉터리 해설들이 난무하게 됐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중국 송말원초 때 화가 정소남(1241~1318)이 망국에 대한 변함없는 충절의 상징을 담아 묵난화법을 창시한 것에서 기원했다고 알려진 묵난화는 조선에서도 충절을 중시하는 선비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했다. 결국 ‘엉터리 난 그림’이라 함은 ‘국가에서 공인받지 못한 난 그림’이란 의미이고, 정소남의 필의와는 다른 의미로 그린 난화라는 것이다. 저자는 추사가 성리학의 폐해가 만연한 조정을 쇄신하기 위한 새로운 정치이념을 정립하기 위한 용도로 이 그림을 그렸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난화 왼쪽에 있는 화제 중 ‘시위달준방필’(始爲達俊放筆)로 봐 왔던 미술사학계의 통념도 반박한다. 저자는 그림에는 분명 ‘갈 준’(?)으로 돼 있는데 몇몇 연구자들이 사람인변을 추가한 ‘준걸 준’(俊)자로 읽었다고 지적한다. 마음대로 고쳐 읽은 탓에 존재하지도 않는 ‘달준이’라는 인물을 만들더니 ‘처음에 달준이를 위해 그렸으니’라고 해석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시작할 시’(始)로 읽어 온 글자 역시 흘려쓴 필획의 움직임을 재현해 볼 때 ‘왕비 비’(妃)로 읽는 것이 타당하며, 풀이하면 ‘왕비가 거만한 결단을 내리도록 하기 위해 붓을 놀리니’라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당시 강력한 세도가였던 안동김씨 가문의 뿌리가 순원왕후 김씨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추사가 이 난화를 통해 그들의 장기 집권을 막고자 했던 의도가 숨어 있다고 결론짓는다.
기존 학계의 해석을 공격할 때 일부 비약이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기존의 관점을 뒤집어 생각해 보려는 저자의 시도는 신선하다. 저자도 책 속에서 자신의 파격적인 해석에 대해 독자들이 반신반의하거나 마뜩잖아할 것을 예상하고 있는 만큼 저자의 해석을 따를지 여부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2018-02-24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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