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 돈 풀자 환율 하락
원·달러 환율이 또다시 연중 저점을 경신하면서 환율을 둘러싼 공식이 속속 깨지고 있다. 경제 위기 때는 통상 환율이 올라간다. 외환 위기 때 원화 환율이 달러당 2000원에 육박했던 게 그 예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때도 달러당 1400원을 넘어섰다. 최근 우리 경제는 ‘6분기 연속 0%대(전기 대비) 성장’이라는 전례 없는 장기 불황을 겪고 있다.환율 하락이 수입물가를 끌어내려 소비에 도움을 준다는 이론도 흔들리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이 1% 포인트 하락하면 6~9개월 뒤 소비자물가는 0.12% 포인트 떨어진다. 하지만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경제정책실장은 “1000조원이 넘는 가계 빚에 짓눌려 물가가 떨어져도 (경제주체들이) 지갑을 열 여력이 없다.”면서 “환율 하락에 따른 내수 활성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진단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신흥국의 환율을 끌어내린 가장 주된 요인은 선진국의 돈 풀기다. 이럴 때는 각국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려 ‘맞불 작전’을 펴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소규모 개방경제라 무리라는 회의적 시각이 많다.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우리나라가 아무리 돈을 풀어도 경제 규모 자체가 열 배 이상 차이 나는 미국이나 일본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라면서 “자칫 가계 부채 악화 등의 부작용만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무역협회가 올 3월 988개 수출기업을 조사한 결과 올해 사업 계획을 짤 때 대기업은 환율을 평균 1098원, 중소기업은 1106원으로 계산했다. 이미 이 선은 깨졌다. 한때 환율 방어의 마지노선으로 불렸던 ‘최중경 라인’(1140원)도 일찌감치 무너졌다.
허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금융팀장은 “2007~2008년 경상수지가 균형을 이뤘던 시점의 환율이 달러당 980원이었던 만큼 아직은 좀 더 버틸 여력이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세계 경제 상황이 달라 단순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수출에 타격이 온다며 환율 (하락) 저지에 나서는 것은 옛날 방식”이라며 “성장 기반 자체를 내수로 바꿔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김진아기자 jin@seoul.co.kr
2012-10-31 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