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옥식 박사 11월 출간 저서 ‘북한 교과서 대해부’서 주장
북한이 김일성 항일무장투쟁의 최대업적의 하나로 꼽는 보천보 전투.북한 교과서 등 문헌에는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 주력 부대를 인솔, 압록강을 넘어 혜산진에서 20㎞ 떨어진 일제의 전략적 요충지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현 양강도 보천군)를 습격해 승리를 거뒀다고 쓰여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보천보 업적을 가로채려고 안경을 낀 상관의 사진까지 자신의 것으로 조작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서옥식 초빙연구위원은 11월 출간할 예정인 저서 ‘북한 교과서 대해부’에서 이런 내용을 자세히 다뤘다.
저자는 ‘보천보전투’가 북한의 김일성이 아니라 동명이인 김일성이 이끌었다는 것이 수많은 자료에 의해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북한 김일성은 전투에 참가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지대장 같은 하급 지휘관 또는 부대원 자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당시 보천보주재소 습격부대 토벌에 나선 일제 군경의 발표를 보면 습격을 지휘한 사람은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6사장이었던 김일성이었다.
이 사람은 전투 5개월 뒤인 1937년 11월 13일 일제의 만주군에 사살된 것으로 발표됐다.
이 김일성이 사살되고 이어 제1로군 제2방면군장으로 승진한 사람도 또다른 동명이인인 ‘김일성’이라고 서 위원은 주장했다.
이 ‘김일성’은 일본 추격을 피해 1940년 연해주 하바로프스크 근교에 정착, 동북항일연군 병사들을 훈련시킨 오케얀스카야 야영학교의 교장으로 있다가 1944년께 폐결핵으로 숨졌다고 한다.
당시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이처럼 흔히 쓰였다.
신출귀몰하다는 ‘전설의 김일성 장군’의 소문이 널리 퍼져 있는 데다 군경의 토벌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쓰는 것이 관행처럼 돼 있었기 때문.
서 위원은 “동북항일연군의 단위부대장들은 거의가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썼던 것으로 전해진다”며 “북한 김일성 즉, 제3의 김일성은 1931년 중국공산당 가입시 본명 김성주 대신 김일성이란 이름을 쓰고 북한에 복귀할 때까지 유지했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폐결핵으로 숨진 제2의 김일성의 사진을 북한 김일성의 것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는 “한국 학계 다수설은 3인의 김일성을 동일인물로 주장하지만, 보천보사건을 북한의 김일성이 주도하지 않았다는 자료와 기록은 더 많다”고 주장했다.
도쿄대 와다 하루키 교수, 버클리대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2011년 작고) 등 학계 다수는 2군 6사장과 제2방면군장, 북한 김일성 모두가 같은 인물로 보고 있다.
동북항일연군 제2방면군장으로 승진한 제2의 김일성은 사진을 남겼는데 빈약한 체격에 키가 작고 코가 높고 안경을 쓴 모습이다.
중국 흑룡강성 혁명박물관에 이 제2방면군장 김일성의 사진과 북한 김일성의 소련군 88여단 시절 사진 등이 전시돼 있는데 두 사람이 동명이인임을 입증한다고 서 위원은 밝혔다.
그러나 북한은 1976년 출판된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백봉 저) 등 다수 문헌에서 안경 쓴 제2의 김일성 사진을 훗날 북한 주석이 된 김일성의 사진으로 날조했다는 것이다.
서 위원은 “북한 김일성은 만주 항일투쟁 시절 남긴 사진이 단 한장도 없고 삽화를 보더라도 북한 김일성은 항일투쟁 시절 결코 안경을 끼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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