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동기 불명확…외부침입 흔적, 유서도 없어
30일 오전 11시40분께 전주 덕진소방서에 119신고 전화가 접수됐다.신고 내용은 “빨리 와 달라. 전에도 한 번 신고한 적이 있다”는 내용뿐 신고자가 누구인지 사고 장소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었다.
소방당국은 전화번호를 역추적해 사고 현장을 알아냈고 소방대원들은 연기가 자욱한 한 아파트에서 의식이 거의 사라진 채 성인 4명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이 집에 세들어 사는 세입자 박모(52)씨와 아내 황모(55)씨, 큰아들(27), 작은아들(25) 등 일가족 4명이었다.
소방대원들은 서둘러 이들을 병원으로 옮겼지만 결국 3명은 숨지고 작은아들은 겨우 목숨을 건졌다.
◇두 번 반복된 사고
31일 경찰에 따르면 박씨 가족이 사는 이 아파트에서는 8일에도 질식 사고가 있었다.
이 사고로 집 안에 있던 박씨 부부와 작은아들이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이들은 “도시가스가 역류해 질식을 일으켰다”며 집주인에게 항의했고 원인 규명을 요구했다.
집주인은 그럴 리가 없다며 전북대학교 산학협력단 대기 및 온실가스 관리연구센터에 사고 조사를 의뢰했고 박씨의 큰아들도 한국가스안전공사에 사고 조사를 의뢰했다.
조사 결과 질식의 원인을 밝혀낼 수는 없었지만 가스시설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박씨 가족과 집주인은 조사 결과에 서로 오해를 풀었고 첫 번째 ‘질식 사고’는 헤프닝으로 남은 채 지나가는듯했다.
그로부터 20여일 뒤 이 아파트에서는 또 한 번의 질식사고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안방과 작은 방 두 곳에서 연탄 화덕이 발견됐고 전형적인 자살 시도 현장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목숨을 건진 작은아들은 사건 현장에서 깨어나 119에 신고했지만 가족 모두를 잃은 뒤였다.
작은아들은 경찰에서 “새벽 5시까지 형과 함께 술을 마셨고 형이 건네 준 우유를 마시고는 곯아떨어졌다”면서 “깨어나 보니 연기가 자욱해 거실로 기어나와 신고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자살이라면 동기는?
경찰의 현장 조사가 한창일 때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을 찾아온 박씨의 친구 김모(58)씨는 가족의 자살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씨는 “얼마 전에도 땅을 알아봐 달라며 박씨가 나를 찾아왔다”면서 “자살을 결심한 사람이 땅을 사는 게 말이 안 된다. 친구가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자살 시도 가능성을 일축했다.
또 “며칠 전 가스 사고가 났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가족 전체가 큰일을 당할 뻔했다’며 박씨가 울분을 토했다. 그런 친구가 자살한다는 것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사고가 발생한 직후 이웃들 사이에서 “생활고가 의심된다”는 말이 나왔다.
박씨 가족은 20여 년 된 56㎡(17평) 아파트에 월세로 살고 있었다.
게다가 아내 황씨는 2년 전 서울에서 큰 사기를 당해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또한 자살 시도의 이유로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박씨는 집 근처에 2층짜리 콩나물 재배 공장을 소유하고 있고 큰아들 역시 체인 형식의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었다.
두 사업체 모두 상당히 장사가 잘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박씨의 공장 근처에서 월세를 얻은 이유도 잠시 머무를 집이 필요해서지 생활고 때문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자살 시도가 아니라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네 식구가 함께 목숨을 끊기 위해 두개의 연탄 화덕까지 준비했다면 유서를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가족이 자살을 시도할 때는 유서를 남기는 것이 일반적인 경우라는 게 경찰 관계자의 설명이다.
마지막으로 유일한 생존자인 작은아들도 한결같이 자살 시도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작은아들은 경찰에서 “의식이 있는 동안에는 가족의 자살 시도가 전혀 없었다”고 자살 시도 자체를 부인했다.
◇외부침입 흔적 없어
또 하나의 의문점은 외부의 침입 흔적이 없다는 점이다.
경찰 조사 결과 숨진 3명의 직접적인 사인은 질식사로 밝혀졌다.
외부 침입의 흔적이 없어서 이번 죽음은 가족 4명 외에는 관련자가 없다는 것.
가족 중 누군가 주도로 자살 시도가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나머지 성인 3명을 설득하거나 강제로 자살에 동참하도록 하기는 어렵다.
또 설사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유일한 생존자인 작은아들 역시 형과 함께 술을 마신 뒤 형이 건네 준 우유를 마시고 곯아떨어졌기 때문에 잠든 사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경찰은 사건 경위는 부검 결과와 작은아들의 정확한 진술이 있어야 명확하게 밝혀질 것으로 보고 있다.
작은아들은 연기를 많이 들이마셔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외부 침입 흔적이 없는 것으로 봤을 때 가족 중 누군가 혹은 전체가 동의해 연탄을 피운 것으로 보인다”면서 “연탄 화덕을 구입한 사람을 추적하고 있고 수면제 등 약물이 사용됐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족들의 혈액을 확보해 놓았다. 확실한 사건 경위는 부검을 해봐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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