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지났다. 젊은 사람들이 없던 마을에도 잠깐 젊은 사람들로 붐볐다. 일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사람들의 귀성행렬이 무슨 환영 같다. 추석날까지 동네 골목길을 메우고 있던 차들이 일시에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현실이 아닌 것 같다. ‘꿈결에 다녀갔나’ 하는 생각에 나는 텅 빈 골목길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곤 한다.
언젠가 절에 오시는 할머니들께 물은 적이 있다. 일년에 몇 번이나 자식들이 찾아오느냐고. 한 번이나 두 번 온다는 대답들이 가장 많았다. 일년 365일 중 하루나 이틀 보는 사람들을 어머니들은 자식이라고 기다리고 기다린다. 자제분들 하고 같이 살라고 하는 말에는 그래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폐를 끼치기가 싫다는 것이다. 거래로 치면 이건 완전히 불공정 거래인 셈이다. 기를 때 얼마나 많이 가슴 조이고, 얼마나 많이 투자했는데 돌려받는 것이 전혀 없다면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도 어머니들은 불평 한 마디 없다. 언제 대가를 바라고 자식들 키웠느냐고 오히려 나를 나무라신다.
자식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기엔 나는 왠지 거부감이 있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집착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자식을 향한 사랑도 어쩌면 집착인지도 모른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집착이 아니라 진정 사랑이라면, 내가 힘들고 외로우니 네가 곁에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하지 않을까. 진정한 사랑은 주는 만큼 요구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완성시켜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만약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고 받기를 스스로 포기한다면, 그것은 한쪽을 미완으로 방치하는 일이기도 하다. 받기만 하고 주지는 못한다면, 그것은 서글픈 사랑으로 남기 때문이다.
받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주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진정한 어머니의 사랑은 주는 것을 일깨우고, 맹목적인 어머니의 사랑은 받는 것만 가르치는 것은 아닐까. 주는 것을 일깨우지 못한 어머니의 사랑은 불효를 낳게 되고, 그 어머니는 서글픈 사랑의 주인공으로 남게 될 뿐인지도 모른다.
맹목적인 사랑밖에 모른다 할지라도 어머니는 우리 가슴속의 사람이다. 어머니는 밖에 있는 대상이 아니다. 어머니는 우리 안에 자리한 고향이고 생명의 시작이다.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은 내 안의 생명의 근원을 잃는 것을 뜻한다. 그 근원은 사막 같은 세상에서 길을 밝히는 별과도 같다. 가끔 삶이 버거워 무너져 내릴 때 별처럼 떠오르는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를 눈물짓게 한다. 왜 그런 순간에 어머니가 떠오르는 것일까. 세상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어머니의 모습은 한없이 주고 싶은 사랑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식들은 그렇지 않다. 받기에만 익숙해 있을 뿐이다. 받기에 익숙한 사람들은 언제나 의미를 버리고 살아가고,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의미를 향해 살아간다.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안을 살피고, 이익을 쫓는 사람들은 밖으로 치달린다. 그래서 자식은 어머니를 잊고 어머니는 자식을 기다린다. 주는 어머니와 받는 자식은 이렇게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고작 일년에 한두 번 어머니를 찾아오는 자식들의 가슴속에 어쩌면 어머니는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 자식을 기다리며 사는 어머니의 사랑은 서글픈 것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이다. 어머니는 고향이고 우리 가슴속의 사람이다. 밖에 있는 것들은 내게서 나를 빼앗아 가지만, 안에 있는 것들은 잃었던 나를 하나씩 찾아 준다. 어머니와 고향은 내 안에 자리하고 있다. 어머니와 고향을 찾아가는 걸음은 내 안의 생명의 뿌리와 삶의 이유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길을 오려고 하지 않는다. 안으로 돌아가는 그 따뜻한 길을 버리고 추운 밖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다. 추석이 지나 다 떠나버린 골목길에 달빛만이 밝다. 그 밝은 달빛 아래 어머니가 풍경처럼 서성인다. 주는 어머니와 받는 자식의 그 휑한 거리를 달빛만이 가득 메우고 있다.
성전 남해 용문사 주지
자식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기엔 나는 왠지 거부감이 있다.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집착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자식을 향한 사랑도 어쩌면 집착인지도 모른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집착이 아니라 진정 사랑이라면, 내가 힘들고 외로우니 네가 곁에 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만 하지 않을까. 진정한 사랑은 주는 만큼 요구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서로가 서로를 완성시켜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만약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고 받기를 스스로 포기한다면, 그것은 한쪽을 미완으로 방치하는 일이기도 하다. 받기만 하고 주지는 못한다면, 그것은 서글픈 사랑으로 남기 때문이다.
받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주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진정한 어머니의 사랑은 주는 것을 일깨우고, 맹목적인 어머니의 사랑은 받는 것만 가르치는 것은 아닐까. 주는 것을 일깨우지 못한 어머니의 사랑은 불효를 낳게 되고, 그 어머니는 서글픈 사랑의 주인공으로 남게 될 뿐인지도 모른다.
맹목적인 사랑밖에 모른다 할지라도 어머니는 우리 가슴속의 사람이다. 어머니는 밖에 있는 대상이 아니다. 어머니는 우리 안에 자리한 고향이고 생명의 시작이다.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은 내 안의 생명의 근원을 잃는 것을 뜻한다. 그 근원은 사막 같은 세상에서 길을 밝히는 별과도 같다. 가끔 삶이 버거워 무너져 내릴 때 별처럼 떠오르는 어머니의 모습은 우리를 눈물짓게 한다. 왜 그런 순간에 어머니가 떠오르는 것일까. 세상 마지막까지 남아 있을 어머니의 모습은 한없이 주고 싶은 사랑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식들은 그렇지 않다. 받기에만 익숙해 있을 뿐이다. 받기에 익숙한 사람들은 언제나 의미를 버리고 살아가고, 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의미를 향해 살아간다.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안을 살피고, 이익을 쫓는 사람들은 밖으로 치달린다. 그래서 자식은 어머니를 잊고 어머니는 자식을 기다린다. 주는 어머니와 받는 자식은 이렇게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다. 고작 일년에 한두 번 어머니를 찾아오는 자식들의 가슴속에 어쩌면 어머니는 없는지도 모른다. 그런 자식을 기다리며 사는 어머니의 사랑은 서글픈 것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이다. 어머니는 고향이고 우리 가슴속의 사람이다. 밖에 있는 것들은 내게서 나를 빼앗아 가지만, 안에 있는 것들은 잃었던 나를 하나씩 찾아 준다. 어머니와 고향은 내 안에 자리하고 있다. 어머니와 고향을 찾아가는 걸음은 내 안의 생명의 뿌리와 삶의 이유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길을 오려고 하지 않는다. 안으로 돌아가는 그 따뜻한 길을 버리고 추운 밖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이다. 추석이 지나 다 떠나버린 골목길에 달빛만이 밝다. 그 밝은 달빛 아래 어머니가 풍경처럼 서성인다. 주는 어머니와 받는 자식의 그 휑한 거리를 달빛만이 가득 메우고 있다.
2010-09-25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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