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정 없는 인사검증 이유로 선임일정 돌연 연기 박영아 의원 “부처 간섭 줄이려면 출연연 국과위로”
교육기술과학부가 합리적 이유 없이 권한 밖인 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 기관장 선임 일정을 조정함에 따라 특정 인사에 대한 내정설, 지지설 등과 맞물려 ‘정부 개입’ 논란을 스스로 키우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출연연과 그 기관장의 전문성과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출연연의 거버넌스(지배구조)를 현행 정부 개별 부처에서 국가과학기술위원회(국과위) 산하로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도 함께 커지고 있다.
◇ “5개 출연연 원장 인선 2주 연기” 통보…법·규정 없는 ‘월권’ = 18일 교과부와 기초과학기술연구회에 따르면 교과부는 지난 14일 기초과학기술연구회에 5개 출연연 기관장 최종 선임 일정을 2주 연기하라고 돌연 통보했다.
연구회 관계자는 “인사검증에 시간이 필요하다며 일정을 늦추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전했다.
현재 기초과학기술연구회는 생명공학·항공우주·천문·해양·기초과학지원 등 5개 연구원의 후임 원장 선임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기초과학기술연구회 산하 13개 연구원의 기관장은 전적으로 연구회 이사회(이사 13명)가 공모와 평가 과정을 거쳐 최종 확정한다. 적어도 법률·규정 및 공식 절차상 교과부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연구회는 공모를 통해 이미 지난 5일 기관별로 3명씩 후보를 추렸고, 당초 이들을 대상으로 이번주 19~20일 이사회가 면접을 거쳐 곧바로 최종 선정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었다. 19일 생명공학·항공우주, 20일 천문·해양·기초과학지원 연구원장 후보를 차례로 만나 질의·응답, 프레젠테이션 등을 통해 평가한 뒤 각각 당일 투표를 통해 최종 적임자 1명을 뽑아 공개할 계획이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번 교과부의 조정으로 5개 출연연 후임 기관장 인선은 일러야 다음 달 초에나 가능해졌다.
교과부 관계자는 일정 연기 통보 사실을 시인하면서, 연기 이유인 ‘인사검증’에 대해 “단순한 신원조회 정도 수준”이라며 “선임 후 문제 사실이 드러나는 경우에 대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출연연 기관장 후보들에 대한 정부의 인사검증이 법률이나 규정에 있는 절차인지를 묻자 “그렇지는 않다”고 밝혔다.
또 인사검증이 교과부 내부 작업인지, 행안부에 의뢰하는 사안인지, 차관급 이상이 지시·검토하는 사안인지 등에 대해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후보 신원조회’ 이유…과기계 “납득 어려워” = 이 같은 교과부의 움직임에 과학기술계는 대체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이들 5개 출연연의 최종 기관장 후보가 정해진 시점은 벌써 지난 5일이다. 교과부의 설명대로 공인으로서 최소한의 신원조회가 필요하다고 해도, 15명의 신원조회 정도는 이미 끝나고도 남았을 시간이라는 게 과학기술인들의 지적이다.
앞으로 2주가 더 필요하다면, 교과부가 주장하는 ‘단순한’ 신원조회에 거의 한 달이 걸리는 셈이다.
더구나 생명공학·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의 경우 전임 원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물러나 현재 공석 상태로, 오히려 선임 일정을 서둘러야 할 상황이다.
특히 항우연은 2개월에 이르는 장기 기관장 공석과 교과부내 관련 조직·인사 변동 등이 맞물려 아직까지 정부와 한국형발사체(KSLV-II)개발사업 수탁 계약조차 체결하지 못한 상태다.
기대한 1천억원의 관련 예산이 315억원으로 대폭 깎인 것도 모자라 계약 시점까지 늦어지면서 올해 예정된 75t급 엔진 연소시험동 건설 일정이 수 개월 순연될 처지다.
◇’원하는 사람 앉히기’ 시간벌기 의혹 = 따라서 일부 과학기술인들은 교과부가 특정 선호 후보 선임을 위해 기초과학기술연구회 이사회 설득 등 ‘정지작업’에 필요한 시간을 벌려고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실제로 항우연의 경우 최근 기관 안팎으로 A후보자 내정설과 이 후보를 정부가 낙점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항우연 노조(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 소속)까지 반대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전국공공연구노동조합은 성명을 통해 A후보와 관련, “원장 선임절차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름이 회자됐다”며 “해당 분야의 경험과 지식이 일천한 인물이 연구조직을 혁신하고 기업들과의 협업을 구성하면서 중장기적 기술개발 전략을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한 항우연 관계자도 “원장의 기술검토 사항이 얼마나 많은데, 전공도 무관한 비전문가가 원장으로 내정됐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며 “세계적으로 항공우주연구기관의 수장을 비전문가가 맡는 사례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고 지적했다.
비록 이 같은 강한 반발 분위기 때문에 내정이 철회됐다는 얘기까지 다시 흘러나오고 있지만, 여전히 논란의 불씨는 남아 있는 상태다.
물리학 박사 출신으로,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소속인 박영아 의원(한나라당)은 “출연연 인사 관련 논란의 사실 관계에 대해 일일이 확인한 바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다만 근본적으로 출연연에 대한 개별 부처의 간섭을 줄이기 위해서는 출연연이 최근 출범한 국과위 밑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아울러 박 의원은 “연임 논란 등을 감안할 때 현재 3년인 출연연 기관장 임기도 5년 정도로 늘려주는 게 옳은 방향”이라고 덧붙였다.
◇ 과기단체 인사에도 ‘낙하산’, ‘외풍’ 우려 = 출연연뿐 아니라 과학기술단체 인사에도 불필요하게 정부나 정치권 등이 개입한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오는 5월 임기가 끝나는 한국과학창의재단(창의재단) 이사장 후임의 경우 여권과 여러 인연을 맺고 있는 모 대학 K 여교수가 내정됐다는 소문이 벌써부터 파다하다.
실제로 이 교수는 창의재단 이사장 공모에 지원했고, 최근 최종 후보자 3명의 명단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신임 이사장 선임 결과는 이르면 다음 주께 발표될 예정이다.
그러나 유력 후보인 K 교수는 전공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과학기술계 인사로 분류하기 어렵다는 게 대다수 과학기술인의 시각이다.
한 과학기술계 관계자는 “과학기술 분야 단체나 기관장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전문성이 중요한데, 이를 무시하고 낙하산 인사, 전관예우, 보은 인사 등을 위해 나눠줄 하나의 ‘자리’로만 인식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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