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 “상향식 의사결정·대안 제시 조직으로 거듭나야”
민주노총의 위기를 말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노동운동의 선명성’을 내세우며 총파업 중심의 투쟁노선을 고집했지만, 사회적 영향력과 조직 결집력은 갈수록 약화하는 추세다. 대법원 판결로 민노총의 기반인 산별노조 체제마저 흔들릴 지경에 처했다.
정부의 지속적인 ‘민노총 흔들기’가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자기혁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 大法 판결 전부터 조합원 이탈·영향력 약화 ‘뚜렷’
1995년 창립된 민노총의 근간은 산별노조 체제다. 개별 기업노조가 아닌 전국 규모의 산업별 노조가 사용자와의 단체교섭 등에 나섬으로써 영향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민노총의 주력인 금속노조, 공공운수노조, 보건의료노조, 공무원노조, 보건의료노조 등이 모두 산별노조다. 민노총 총 조합원 69만여명의 80%에 달하는 55만여명이 산별노조에 가입했다.
산하 지부·지회의 산별노조 탈퇴를 실질적으로 가능케 한 19일 대법원 판결에 민노총이 “민주노조운동이 어렵게 성장시켜온 산별노조 운동의 토대를 허무는 판결”이라고 강력 반발한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결 이전에도 민노총 산별노조 체제의 기반은 이미 흔들리는 조짐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주력 산별노조의 하나인 전교조 조합원 수는 2003년 9만3천여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현재 5만3천여명 수준으로 주저앉았다. 법외노조 논란 등도 있었지만, 현장 조합원들의 신뢰가 약해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전국공무원노조(전공노)는 공노총(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통공노(전국통합공무원노동조합) 등과의 세력 경쟁에 직면했다.
최근 전공노 광양시지부가 통공노에 가입하려고 하자 전공노가 ‘조직변경 효력정지 가처분신청’을 냈으나, 18일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이를 기각했다. 전공노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얘기다.
민노총의 최대 주력노조인 금속노조는 경영난으로 극심한 노사갈등을 겪었던 쌍용차 노조가 탈퇴하는 등 최근 수년 새 자동차, 조선, 타이어, 철강 등에서 탈퇴 움직임이 잇따랐다.
이달 초 IBK투자증권은 직원 투표를 거쳐 ‘저성과자 해고’를 받아들여 사무금융노조에서 제명당했다. 저성과자 해고는 민노총이 대표적인 ‘노동개악’으로 간주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사안이다.
개별 산별노조의 위기는 전반적인 민노총의 영향력 약화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전체 노동조합원에서 민노총의 비중은 2004년 43.5%에서 지난해 33.1%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한국노총 비중이 50.7%에서 62.2%로 높아진 것과 대조된다. 민노총의 위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투쟁’만 외치다간 자멸”…민주적 의사결정·대안 제시 필요
조직의 기반은 자꾸 약해지고 있지만, 민노총은 ‘투쟁’ 위주의 전략을 절대 버리지 않고 있다.
지난해에는 4월 1차 총파업, 7월 2차 총파업 집회, 11월 민중총궐기 집회, 12월 3차 총파업 등 1년 내내 대규모 집회와 총파업 위주의 노선으로 일관했다. 올해 들어서도 산하 조직에 무기한 총파업 지침을 내렸다.
하지만, 정부의 ‘노동개악’에 맞선 이러한 ‘강대강(强對强)’ 투쟁전략이 과연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에는 의문이 많다.
정부의 강경대응 방침에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 대피 끝에 구속됐고, 민노총 간부들도 잇따라 구속됐다. 강대강 전략의 일방적인 피해는 민노총이 입고 있는 셈이다.
대법원의 판결로 산별노조 산하 지부는 기업노조로의 전환이 가능해졌다. ‘산별노조 탈퇴 도미노’가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제 민노총이 자기혁신과 변화를 꾀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말한다.
정부나 경찰, 대법원 탓만을 하고 있다가는 조직 역량의 위축을 막을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정부 등이 ‘강공’을 펼칠 수 있는 배경에는 민노총이 국민의 지지를 잃었다는 판단이 깔렸지 않겠느냐고 지적한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투쟁 위주의 전략에 국민이 등을 돌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며 “대안을 제시하고, 그 대안이 왜 타당한지 설득하려는 모습을 보여야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민노총 스스로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 첫걸음은 조직 내부의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권혁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법원 판결로 이제 민노총은 산하 조직들의 ‘마음’을 얻어야 이들을 산별노조 안에 잡아둘 수 있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며 “상향식 의사결정 구조의 확립으로 조직 내 민주주의를 복원할 때만 그들의 마음을 붙잡아둘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자성의 목소리는 민노총 내부에서도 들린다.
민노총이 지난해 출범 20주년을 맞아 간부들을 설문조사한 결과 민노총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 ‘관례화된 활동’, ‘지도력 부재’, ‘현장과 맞지 않는 투쟁방침’ 등이 꼽혔다.
대기업 정규직 위주에서 벗어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과감히 끌어안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노동연구원 정재우 연구원은 “정규직 중심의 노동조합에서 비정규직 이슈는 우선순위에서 종종 뒤로 밀려났다”며 “이제는 비정규직을 본격적으로 노조의 틀 안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연구원에 따르면 2007년 16.0%였던 정규직 노조 가입률은 지난해 16.9%로 높아졌지만, 같은 기간 비정규직 가입률은 5.1%에서 2.8%로 급락했다.
다만, 기업들이 대법원 판결을 악용해 민노총 산별노조의 힘을 약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권혁 교수는 “산별노조가 우리나라 노동운동이 힘겹게 얻은 결실이자 소중한 자산이라는 것은 사실”이라며 “단지 산별노조 탈퇴를 유도하기 위해 기업노조 전환을 지원하는 행태 등을 보여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