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8주년인데 판결문 속 일제 잔재 ‘여전’

광복 68주년인데 판결문 속 일제 잔재 ‘여전’

입력 2013-08-14 00:00
업데이트 2013-08-14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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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식 표현 만연…법조인만 아는 ‘외계어’도 수두룩

오는 15일로 광복절 68주년을 맞았지만 법원 판결문 속 일본식 표현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있다.

1945년 광복 이후 일본법을 기틀로 법률을 만들면서 판결문의 문체나 용어도 일본식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판결문 속 일제 잔재 지우기는 법조계의 오랜 과제였다.

대법원은 지난 3월 ‘법원 맞춤법 자료집’을 7년 만에 개정·배포하고, 이런 일본식 표현을 바꿔 쓰도록 권고했다.

하지만 연합뉴스가 청주지법에서 올해 선고된 재판부의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여전히 곳곳에서 일본식 표현이 넘쳐나고 있었다.

◇판결문에 일본식 한자어 투성이

우리 일상생활 곳곳에 많은 일본식 한자어가 남아 있지만 판결문에 사용되는 법률 용어는 그 빈도 수가 특히나 높다.

흔히 쓰이는 ‘가집행’, ‘가압류’, ‘가처분’ 따위의 표현은 ‘임시집행’, ‘임시처분’ 등으로 쉽게 바꿔 쓸 수 있지만 일본식 표기가 그대로 남아 굳건히 사용되는 전형적인 법률용어다.

이밖에 판결문에서 자주 사용되는 일본식 한자어로는 시정(施錠)<잠금>, 감안(勘案)<고려>, 납득(納得)<이해>, 논지(論旨)<말하는 취지>, 지분(持分)<몫>, 신병(身柄)<신체>, 미연(未然)<미리>, 수순(手順)<차례>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습관처럼 사용되는 문구

많은 판사가 판결문 속 주문을 작성할 때 습관처럼 사용하는 ‘피고인을 ∼에 처한다’는 문구도 대표적인 일본식 표현이다.

강압적인 어투로 선고를 기다리는 피고인에게 불필요한 긴장감을 준다는 이유로 일부 지방법원에서는 ‘피고인에 대한 형을 ∼으로 정한다’는 식으로 순화해 사용하고 있지만 극히 일부의 얘기다.

거의 모든 판결문에 최소 2∼3회 이상 나오는 ‘상당(相當)하다’, ‘참작(參酌)하다’ 역시 ‘타당하다’, ‘헤아리다’라는 쉬운 말로 바꿔 쓸 수 있다.

◇불필요한 번역투 표현

불필요하게 사용되는 일본어 번역투도 개선해야 할 대상이다.

’사유가 된다고 할 것이다’, ‘액수가 크다고 할 것이다’, ‘효력이 있다고 할 것이다’ 등은 일본어 ‘노데아루(のである)’(∼할 것이다)에서 유래한 번역투 표현이다.

이를 대법원 용례집에서는 ‘∼있다’로 바꾸도록 권장하고 있다.

판결문에서 단골로 눈에 띄는 ‘∼함에 있어’, ‘∼에 의하여’, ‘∼에 있어서’는 ‘∼하면서’, ‘∼에 따라’, ‘∼에서’로 표현하는 것이 옳다.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것이다’와 같은 이중 부정도 일반인의 판결문 이해를 어렵게 하는 대표적인 일본어 번역투로 ‘∼해야 한다’로 간결하게 표현해야 한다.

◇법조인만 아는 ‘외계어’도 수두룩

일본식 표현 외에도 지나치게 어려워 마치 ‘외계어’처럼 느껴지는 법률 용어 역시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손해배상 청구 소송 판결문에서 간혹 사용되는 ‘각자’가 대표적인 예다.

’각자’의 국어사전상 의미는 ‘각각의 사람이 따로따로’이다. 일본사전에서도 ‘각자’는 ‘저마다’란 뜻이다.

하지만 판결문에서의 ‘각자’는 ‘각각’이 아닌 ‘연대해서’란 전혀 다른 뜻으로 사용된다.

사전적 어원도 없는 정체불명의 법률 용어인 셈이다. 결국 이런 법률 용어를 접하는 일반인들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실제 지난 6월 청주지법에서 있었던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재판부가 ‘피고 5명은 각자 600만원의 손해배상액을 지급하라’고 판결하자 손해배상 총액이 600만원이 아닌 3천만원으로 오인되는 혼란을 빚기도 했다.

’환부하다’(돌려주다), ‘본지’(본래의 뜻), ‘선의’(실제의 사실과 다름을 모르고 있었음) 등 판결문에서만 사용되는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들도 적지 않다.

법조계의 한 관계자는 “최근 개인이나 모임 차원에서 순화운동을 펼치는 등 개선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일부에선 판결문이 가지는 권위를 의식해 변화를 외면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법률 고유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어려운 용어를 사용해야 할 때도 있겠지만 최소한 일본식 표현이나 소통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용어는 될 수 있으면 알기 쉬운 우리말로 표현하려는 판사 개개인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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