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과 한 뒤틀린 몸짓에 서민 울고 웃었다

흥과 한 뒤틀린 몸짓에 서민 울고 웃었다

입력 2012-07-10 00:00
업데이트 2012-07-10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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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사춤’ 공옥진 여사 삶과 예술

“통섭의 시대에 춤과 소리와 이야기를 아우르는 큰 별이 스러졌습니다.”

전통 공연 기획자인 진옥섭 한국문화의집 코우스 예술감독은 고(故) 공옥진 여사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한과 해학을 담아 소리를 하고 춤을 추면서 창조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1인 창무극’의 창시자이고 곱사춤과 동물춤으로 사람들을 웃겼다가 울리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예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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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공연 속에 춤을 넣고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담아 관객을 웃기고 울렸던 ‘1인 창무극’의 대가, 고 공옥진 여사.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도 전남 영광에 있는 작은 전수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전통무용뿐만 아니라 많은 창작춤을 만들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고인을 ‘병신춤’으로만 기억한다. 고인은 그때마다 “병신춤이 아니라 곱사춤”이라고 정정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판소리 공연 속에 춤을 넣고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담아 관객을 웃기고 울렸던 ‘1인 창무극’의 대가, 고 공옥진 여사.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에도 전남 영광에 있는 작은 전수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전통무용뿐만 아니라 많은 창작춤을 만들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고인을 ‘병신춤’으로만 기억한다. 고인은 그때마다 “병신춤이 아니라 곱사춤”이라고 정정하기도 했다.
연합뉴스
●최승희 일본집서 문틈으로 춤 배워

호적으로는 1933년생이지만 고인은 1931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판소리 명창 공대일(1910~1990) 선생이고 아버지의 팔촌형 공창식(1887~1936)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으뜸가는 소리꾼이자 명창 임방울의 스승이기도 하다. 전라도 유명 예술인 집안에서 자라 사람이 북적거리는 환경에서 어릴 적부터 소리를 접했다. 아버지에게는 단가(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하는 짧은 노래)를 배웠다. 단가를 모두 뗀 뒤에야 사설을 배울 수 있다는 가르침 때문에 사랑채 심부름을 하거나 부엌에서 흥얼거리면서 판소리 사설을 익혔다.

일곱 살쯤에 옥진은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일본으로 가던 ‘신무용의 대가’ 최승희 선생에게 아버지가 1000원을 받고 부엌데기로 판 것이다. 아버지는 그 돈으로 강제 징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린 옥진은 최승희의 일본집에서 집안일을 하며 틈틈이 문틈으로 춤을 배웠다. 10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해방을 맞고, 열일곱 살에 경찰관과 결혼했다. 6·25전쟁 통에 경찰관 가족이라는 이유로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했다.

고인은 여성 4인조 그룹 2NE1의 멤버 공민지의 고모할머니이기도 하다. 스포츠서울
고인은 여성 4인조 그룹 2NE1의 멤버 공민지의 고모할머니이기도 하다.
스포츠서울
●야속한 세월 견디며 삶의 애환을 예술로

전쟁 뒤에 딸을 하나 낳아 어엿한 가족을 꾸리는가 싶었는데 남편이 동네 처자와 눈이 맞아 버렸다. 미련 없이 딸을 둘러업고 집을 나와 세상과 맞닥뜨렸다. 절에 얹혀살면서 스님들 밥을 지어 주고 때때로 절 뒤편에서 즐거운 일, 슬픈 일을 떠올리며 혼자 웃고 울었다. 1960년대에는 임방울 창극단, 김연수 우리악극단, 박녹주 국극협회 등 여러 국악 단체에 참여하면서 무대를 만들었다. 야속한 세월을 견디면서 몸에 익은 삶의 애환을 고스란히 풀어낸 것이 ‘1인 창무극’이다.

1978년 서울 공간사랑 개관 기념 공연에서 첫선을 보인 ‘1인 창무극’은 그야말로 ‘빅히트’를 쳤다. 전통 무용에 해학적인 동물춤을 접목한 ‘1인 창무극’은 수십년간 서민을 웃기고 울렸다. 그 후 동양인 최초로 미국 링컨센터에서 단독 공연을 하기도 했고 일본, 영국 등지에서 공연하면서 “가장 서민적인 한국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80~90년대는 ‘1인 창무극’ 전성기였다. 1995~1996년 서울 대학로 두레극장 공연에서는 500석 공연장에 1000여명이 몰려들었다. 이쯤이면 국악계 어르신으로 대접을 누릴 만도 한데 고인은 한사코 호텔 숙식을 거부했다. 최고의 스타였지만 올 때마다 김치를 담아 와 제작진을 일일이 불러 먹이는, 그저 어머니 같은 분이었다고 했다.

“서울 종로3가에 있는 운당여관이라는 곳에서 늘 묵었고 함께 올라온 아주머니와 직접 밥을 해 드셨어요. 방값도 못 내던 무명의 서러움을 생각하면서 이만큼이나 됐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면서요.” 당시 공연기획을 한 진옥섭 대표의 말이다.

대중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공옥진의 ‘1인 창무극’이 무형문화재로 인정받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1998년 고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듬해 ‘1인 창무극’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러나 전남도 문화재위원회는 ‘전통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창작한 작품’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10년이 지난 2009년 재신청을 할 때는 건축물이 주로 대상이 되는 ‘등록문화재’ 지정을 추진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 2010년 무형문화재로 인정

2010년 5월 마침내 ‘판소리 1인 창무극 심청가’가 전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 예고되고 그해 11월 최종 인정됐다. 2010년 6월 서울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고인은 “맺히고 맺힌 한을 풀었다. 이젠 죽어도 원이 없다.”며 온 힘을 다해 생애 마지막 춤을 췄다.

“공옥진 선생 하면 ‘곱사춤’부터 떠올려요. 하지만 이건 본질이 아닙니다. 곱사춤은 심청가에 나오는 맹인잔치에서 공 선생이 표현한 많은 맹인 중 하나일 뿐입니다. 곱사춤이나 동물춤은 공 선생만이 할 수 있고 그분밖에 못 하는 ‘1인 창무극’의 일부인 거죠. 어떤 공연을 봐도 관객의 눈물과 콧물을 쏙 빼는, 그러다가도 또 언제 그랬느냐면서 웃겨주는 명공연을 보지 못한다는 게 우리 문화계에는 큰 상실일 겁니다.”

빈소는 전남 영광 농협장례식장 2호실. 발인은 11일 오전 8시로 잠정 결정됐다.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2012-07-1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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