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 CU에서 판매되는 수제맥주 업체 크래프트브로스의 ‘라이프’ 맥주.
CU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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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맥주에 수제맥주 생태계 씨 말라
국내 수제맥주산업의 생태계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정부가 맥주의 위탁생산(OEM)을 허용하는 내용의 주세법을 개정한 이후 대형 공장을 갖춘 롯데와 오비가 편의점 ‘4캔 만원’ 시장에 본격 진출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국내 맥주업체들의 ‘편의점용 맥주’ 생산을 도맡으면서 코로나19로 의존도가 더욱 커진 편의점 캔맥주 시장을 빠르게 장악하고 있습니다. 업계에선 “편의점에 들어가는 500㎖ 캔을 롯데가 독식해 캔 자체가 씨가 말랐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국내 맥주산업이 일부 대규모 주류 회사들만의 ‘독과점 무대’였던 과거를 답습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깊습니다.
5~6년 전까지만 해도 장밋빛 전망이 가득했던 국내 수제맥주산업이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일까요? 근본적인 원인은 맥주 시장이 ‘4캔 만원’이라는 가격에 종속돼 버린 현실에 있습니다. 맥주 종량세가 시행되기 전 해외에서 박리다매로 들여온 수입 맥주는 국내 편의점에서 ‘4캔 만원’에 팔렸고, 이는 소비자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후 맥주에 대한 세금이 종가세에서 종량세로 전환되면서 세금 부담을 줄인 국내 중소규모 업체들이 수입 맥주, 대기업 맥주 중심의 시장이었던 편의점, 대형마트 등에 진출하게 됩니다. 문제는 ‘가격’이었죠.
●롯데·오비에 OEM 주고 스타일 포기
소비자들은 이미 맥주를 4캔 만원에 구매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마진을 대폭 줄여 ‘수제맥주 스타일’의 맥주도 4캔 만원에 팔아야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구스아일랜드, 핸드앤몰트 등 수제맥주 라인업을 갖춘 오비맥주는 빠르게 대형 공장을 돌려 4캔 만원의 수제맥주 스타일 맥주를 편의점 매대에 올려놨습니다. 이어 수제맥주 업체 가운데 규모가 큰 편에 속했던 제주맥주, 카브루, KCB, 세븐브로이 등도 4캔 만원 시장에 참전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코로나19가 터졌습니다. 인원·영업시간 제한에 못 이긴 음식점과 펍들이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에게 생맥주를 납품해 먹고살았던 수제맥주 공장들은 거래처를 잃어 생존 위기에 처합니다. 남은 시장은 ‘곰표맥주’로 대박이 터진 편의점 홈술 시장뿐입니다. ‘4캔 만원’ 게임을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선 게임에 참가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죠. 미친 듯이 공장을 돌려 4캔 만원 맥주를 생산하다 보니 전국 편의점에 납품할 물량을 저가로 맞추려면 롯데에 OEM을 주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막대한 상금을 받는 최후의 승자는 롯데와 오비가 되겠죠.
이 과정에서 원가 절감을 위해 가향을 첨가하거나 원료값이 많이 들어가는 스타일의 맥주는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홉이 많이 들어가는 ‘뉴잉글랜드IPA’ 스타일을 국내에서 가장 잘 만들기로 유명했던 경기 김포의 크래프트브로스 양조장이 최근 롯데 OEM으로 맥주를 생산하며 대표 제품인 ‘라이프(LIFE)’ 맥주의 스타일을 라거로 바꿔 편의점에 내놓은 것도 이 같은 이유일 가능성이 큽니다.
●위탁생산 어려운 양조장은 고사 직전
위탁생산조차 할 여력이 없는 마이크로 양조장들은 고사 직전입니다. 경기 광주에서 최소 규모의 맥주 공장을 운영하는 한 업체 대표는 “소규모 맥주 공장은 제조업으로 분류돼 정부로부터 코로나 관련 지원을 받을 수도 없다”고 하더군요. 또 다른 관계자는 “우리(수제맥주)가 물량 공세가 가능한 대기업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4캔 만원 시장으로 스스로 들어간 것이 문제 아니겠냐”고 탄식하기도 합니다.
코로나19가 끝나면 괜찮아질까요? 어쨌든 끝까지 버티는 수제맥주 업체도 이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지 않냐고요? 롯데나 오비라는 골리앗이 연 1000억원이라는 ‘소규모 게임’에 참전한 이상 결과는 뻔하고, 과정은 힘든 싸움이 될 것입니다.
2021-10-01 2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