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위로다] <9>이종형 시인
일러스트 조숙빈 기자 sbcho@seoul.co.kr
담임 선생님께 인사도 못 드렸고
반 친구들도 아직 만나보지 못했어요
어젯밤도 형아랑 같이
학교 가는 꿈을 꿨지만 아침에 일어나보니
내 멋진 교복은 여전히 옷걸이에 걸려있어요
엄마는 요즘 집에서 젤 무서운 사람이에요
하루 종일 우리 뒤치다꺼리 하느라
숨 막혀 죽을 것 같다는데
엄마가 죽을까봐 걱정이 돼서 그런지
형아도 아빠도 엄마 눈치 살살 보며
말을 잘 듣는 거 같아요
나를 작은 강아지라 부르는 할아버지께
언제면 학교에 갈 수 있을지 여쭸더니
지구별이 조금 고장나서
지금 어른들이 열심히 고치고 있는 중이래요
나도 같이 고치고 싶다고 했더니
엄마 말씀 잘 듣는 게 아픈 지구별을 빨리 낫게 해주는 거래요
그렇게 몇 밤만 더 자면 드디어 학교에도 갈 수 있고
이상한 1학년이 아니라 진짜 1학년이 되는 거래요
고장난 지구별 빨리빨리 고쳐주세요
더 이상 아프지 말게 해주세요
꼭 좀 부탁드려요
이종형 시인
1956년 제주 출생. 2004년 ‘제주작가’로 등단.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출간. 5·18문학상 수상.
2020-05-25 2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