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여, 이념에서 나와 서민에게 가라

진보여, 이념에서 나와 서민에게 가라

입력 2014-04-12 00:00
업데이트 2014-04-12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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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래를 위협하는 건 엘리트적 좌우 이념이 아니라 노동·관계 등 정신적 가치의 붕괴

진보의 착각/크리스토퍼 래시 지음/이희재 옮김/휴머니스트/768쪽/3만 5000원

크리스토퍼 래시
크리스토퍼 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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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라는 관념에 논박할 만한 수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진보를 믿을까?”

역사가 늘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할 것이라는 기대는 무너졌다. ‘공동체’와 ‘모두가 윤택한 삶’을 기치로 내걸어 지지를 얻은 좌파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20세기 말에는 우파가 재부상했다. 복지국가가 자유시장주의를 대체하리라던 좌파의 신념도 무너졌다. 그런데도 진보에 대한 믿음이 여전한 현실을 두고 미국 역사가이자 사회비평가 크리스토퍼 래시는 ‘괴이한 현상’이라고 규정한다. 래시는 ‘진보의 착각’(원제 The True and Only Heaven)에서 이 시대 지식인들이 길 잃은 진보를 향한 맹목적인 낙관주의와 오해에서 깨어나야 한다면서 진보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원제(참되고 오직 하나뿐인 천국)의 의미는 곧 진보가 추구하는 이상향이다. 과거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저자는 1970년대 중반부터 성 해방, 여성의 직장생활, 전문기관의 아동 보육 등으로 대변된 좌파의 기획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이때 등장한 새로운 좌파는 초창기 좌파의 역사에 무지해 분파주의는 극에 달하고, 이념적 순결성에 집착하며, 낙오된 사람들의 집단 감상주의처럼 그 역사에서 가장 불미스러운 모습을 자꾸 되살려 내려 했다. 더불어 “미래와 싸운 것이 아니라 후지고 몽매하고 생각이 짧아 진보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싸우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엘리트주의에 매몰됐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진보의 천국은 더이상 없다고 주장하며, 사회 내부의 심리·문화·정신적 질서를 다시 세우는 일에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19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진보에 관한 논쟁을 이끌어 온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좌파의 궤적을 고찰하면서 그동안 오독했던 기독교 전통, 계몽주의와 세계주의, 자유주의와 서민주의 등 다양한 이론과 가치관을 재조명하는 이유다.

저자는 좌파와 우파는 생산물의 분배를 두고 극심하게 갈등했으나 양쪽 모두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긍정했다고 해설한다. 대량 생산을 통한 생활 수준의 향상을 추구하면서 결국 환경재앙과 빈부격차의 심화, 전 세계적 폭동과 테러, 기후변화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이제 미래를 위협하는 것은 좌우의 이념 공방이 아니라 사회 내부에서 일어나는 심리·문화·정신적 기초의 붕괴다. 노동의 즐거움과 안정된 관계, 가정생활, 향토애, 역사적 귀속감 등 정신적 가치가 무너지는 상황이다. 이때에 진보가 추구해야 할 것은 전체주의나 집단주의 등 이념적 재무장이 아니다. 현재의 한계를 명확하게 바라보고 사회·문화적 질서를 바로 세우는 ‘서민 철학’이다. 욕망을 절제하고 한계를 받아들이는 기독교 금욕주의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봤다. 보통 ‘대중 영합주의’로 쓰이는 포퓰리즘(populism)을 저자는 자립과 책임, 검약과 절제를 중시하는 미국 중하류층의 특성을 일컫는 ‘서민주의’로 풀이하면서 진보에 필요한 태도의 연장선에 두었다.

과거 흑인 민권운동과 흑백차별 철폐 운동은 평등과 인권의 가치에 부합하는 진보 운동이었다. 역사가 크리스토퍼 래시는 진영은 다르더라도 상대를 존중할 때 진정한 연대가 탄생한다고 주장한다. 1930년대 백인들의 수준 높은 생활을 강조하는 광고판 앞에 생필품을 배급받으려고 서 있는 흑인의 모습은 당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위). 1963년 미국 워싱턴DC 링컨기념관 앞에서 연설하는 마틴 루서 킹 목사(가운데). 1950년대 후반 미국 아칸소주 리틀록의 센트럴고등학교에 흑인 학생이 등교하자 백인 여성이 비난을 퍼붓고 있다(아래).  휴머니스트 제공
과거 흑인 민권운동과 흑백차별 철폐 운동은 평등과 인권의 가치에 부합하는 진보 운동이었다. 역사가 크리스토퍼 래시는 진영은 다르더라도 상대를 존중할 때 진정한 연대가 탄생한다고 주장한다. 1930년대 백인들의 수준 높은 생활을 강조하는 광고판 앞에 생필품을 배급받으려고 서 있는 흑인의 모습은 당시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 준다(위). 1963년 미국 워싱턴DC 링컨기념관 앞에서 연설하는 마틴 루서 킹 목사(가운데). 1950년대 후반 미국 아칸소주 리틀록의 센트럴고등학교에 흑인 학생이 등교하자 백인 여성이 비난을 퍼붓고 있다(아래).

휴머니스트 제공
또한 저자는 연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호한 인도주의와 보편성 대신 ‘평범한 이들’의 개별적 속성에 눈을 돌리고 향토애에 기반한 공동체 의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를테면 진보는 흑인과 백인이 같은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비슷한 사람들과 모여 살고 싶어 하는 공동체 본능은 생각보다 강하므로 다름을 존중해야 한다는 얘기다. 공동체의 보존은 평등 못지않게 소중한 가치인 동시에 아이러니하게도 평등에 꼭 필요한 가치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더불어 다른 진영에 있는 상대방에게도 공동체나 집단에 대한 충성이 있다는 점을 존중해야 진정한 연대가 가능하다고 했다. ‘관용’이라는 보편주의적 처방이 아니라 ‘용서’라는 종교적 이상이 전제된 것이다.

이 책의 함정은 저자가 사망하기 3년 전 1991년에 나왔다는 점이다. 출간 당시 저자는 좌파에게는 파시스트로, 우파에겐 반기업주의자로 비난받았다. 번역본이 나온 현재 한국에서는 ‘23년 전의 사유가 현재에 적용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생길 법도 하다. 진보 이론을 정리한 사유의 결과물이 서민의 삶과 유리된 채 이념 논쟁과 권력 투쟁을 반복하는 우리 사회에 새로운 시사점을 던지는 것은 분명하다.

최여경 기자 cyk@seoul.co.kr
2014-04-12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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