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의 언파만파] 언어의 역사성

[이경우의 언파만파] 언어의 역사성

이경우 기자
입력 2020-05-10 22:32
수정 2020-05-11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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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우 어문부 전문기자
이경우 어문부 전문기자
사랑은 변하는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변치 말자고 다짐하고 약속한다. 약속을 기념하며 징표를 만들기도 한다. 그래도 사랑들은 식고 변하고 사라진다. 언어도 변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어서 누가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사과나무의 열매를 ‘사과’라 부르고, 계절을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이라고 하는 사회적 약속을 함부로 깨지 못한다. 그렇다 해도 말은 새로 생기고 성장하고 소멸한다. 규범을 만들고, 그것을 선언하고, 사전에 가둬 놓아도 말은 변한다. 언어의 역사성이다.

세종대왕 때 사람들에게 ‘세수’하라고 하면 그들은 얼굴을 씻지 않을 것이다. 겨우 손만 닦을 뿐이다. 그 시대에는 ‘세수’가 ‘손을 씻다’는 말이었다. 다시 ‘얼굴’을 보라고 하면 자기 몸을 둘러볼 것이다. 지금은 ‘얼굴’이 “눈, 코, 입이 있는 머리의 앞면”을 가리키지만, 그때는 ‘몸 전체’, ‘모습’을 뜻했다.

‘어리다’는 또 “나이가 적다”는 말이 아니었다. 훈민정음 서문의 ‘어린 백성’은 ‘어리석은 백성’이란 말이었다. 그때는 ‘어리다’가 ‘어리석다’였다. ‘싸다’는 비용이 보통보다 낮다는 말이지만, 이전에는 반대로 “값이 나가다”를 의미했다. ‘에누리’는 값을 깎는 게 아니라 값을 얹어 주는 것을 가리켰다. ‘방송’은 본래 “죄인을 감옥에서 나가도록 풀어 주던 일”이었으나, 지금은 “음성이나 영상을 널리 보내는 일”이다.

지금도 국어사전에는 ‘갑부’를 “첫째가는 큰 부자”, “으뜸가는 부자”라고 해 놓았지만, 현실에선 이렇게 쓰지 않는다. ‘갑부’를 ‘부자’와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세계 최고의 갑부”라고 해도 시비가 없다.

코로나19가 발생하면서 ‘확산’이란 낱말이 어느 때보다 많이 쓰인다. ‘확산하다’, ‘확산되다’가 같이 보이는데, 한쪽에선 ‘확산하다’를 우선시하고, ‘확산되다’는 바람직하지 않은 형태로 보려고 한다. 그렇지만 대중들은 ‘확산하다’는 뭔가 부족하다고 본다. ‘확산하다’가 가졌던 의미를 ‘확산되다’가 더 선명하게 전달한다고 여긴 것이다. ‘-되다’가 주는 피동형 여부는 상관하지 않는다. ‘당선하다’보다 ‘당선되다’를 더 편하게 쓰는 현상도 마찬가지다.

언어의 역사성은 달리 말하면 과거와 현재의 단절이기도 하다. 겉만 같을 뿐 속은 다른 것이다. 그런데도 ‘역사’라는 과거에 이끌린다. 거기에 기준을 두고 현재를 판단하려는 습관이 있다. 역사성을 말하면서도 변치 않고 영원하기를 바라는 듯하다. 변하는 건 약속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어문부 전문기자 wlee@seoul.co.kr
2020-05-11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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