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형 산업부 기자
브누아 아몽 당시 프랑스 교육부 장관은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어 “시험은 무효로 하지 않고, 늦은 학생들도 불이익은 없다”고 발표했다. 공정성 논란이 불거질 수 있음에도 ‘학생들의 권익이 최우선’이라는 원칙이 적용된 결과였다. 언론이나 일반 국민들 역시 ‘문제 유출 재발 방지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시험의 공정성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다. 1808년 나폴레옹이 도입해 200년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바칼로레아는 프랑스 교육의 자존심이자 ‘박’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린다. ‘박’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관심은 한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박’ 문제 사전 유출은 ‘고질병’이다. 2011년에는 수학 문제 4개 가운데 하나가 시험 전날 인터넷 사이트에 유출됐다. 당시에도 프랑스 교육부는 유출된 문제만 무효로 처리하고 나머지 3개 문제로 시험을 치렀다. 역시 ‘신속한 결정’을 내려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의 혼란을 최소화하겠다는 원칙이 우선적으로 적용됐다. 물론 문제 유출자는 철저히 색출해 처벌받는다. 3년 이하의 징역형이나 최대 9000유로의 벌금이 내려진다.
지난달 31일 교육부와 수능 출제 기관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지난해 수능 세계지리 8번 문항의 출제 오류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나서서 ‘피해 학생 전원구제’를 천명하고, 평가원장은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처음 출제 오류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해 수능시험 직후였다. 교육 당국은 책임 회피에 급급했고, 문제를 출제한 교수들이 몸담고 있는 관련 학회들도 철저히 입을 다물었다. ‘학생’들이 치른 시험인데도 그들의 목소리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학생들의 억울함을 풀겠다며 앞장선 것은 일개 학원 강사였다.
교육 당국의 공언처럼 전원 구제가 가능하지도 않지만, 설사 이제 와서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게 된들 잃어버린 이들의 1년은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당시의 장관도, 평가원장도 이미 바뀐 상태인데 누구한테 책임을 물을 것인가. 몇 년 전부터 수능을 비롯한 한국 입시 제도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인터넷을 중심으로 ‘박’의 철학 시험을 부러워하는 목소리가 넘쳐난다. 주입식 교육 대신 창의성과 개인의 권리를 묻는 철학시험 질문들이 수십 개씩 돌아다닌다. ‘박’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정작 프랑스에서 ‘박’은 합격률이 90%를 넘어서는 등 ‘쓸모없는 시험’이라는 비난에 직면해 있다. 프랑스 정부도 대입제도 개혁을 고심하고 있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완벽한 대입 정책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얘기다. 수능이 ‘박’에서 배워야 할 것도 학생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그 정신이지 시험 문제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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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3 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