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은영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신문에 이런 ‘착한’ 기사들이 좀 더 많아지면 좋겠다. 사람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이 많이 하는 행동을 따라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사회적 증거’의 원리라고 부른다. 다수의 행동은 그 상황에 맞는 행동임을 입증하는 단서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수를 따르는 것이 무난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문에 이타적인 행동이 많이 등장하면 ‘이런 좋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구나’하고 생각하며 ‘나도 이렇게 해 볼까’하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다.
대개는 부정적이고 놀라운 사건들이 기사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신문에 좋지 않은 일들이 자주 등장한다. 따라서 자칫 기사화된 좋지 않은 일들이 주변에 보편화돼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쉽다.
예컨대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흔하다는 기사를 접하면 그것이 다수라는 생각에 비리를 저지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기가 더 쉽다는 것이다. 공익광고에서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차들이 이렇게 많아서야 되겠습니까?’하며 다수가 위반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보다 ‘다들 정지선을 잘 지키고 있는데 아직도 지키지 않는 차가 있나요?’하며 딱 한 대의 차만 위반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때 ‘나도 지켜야겠다’는 마음을 더 많이 갖게 하는 것도 같은 원리다.
한편, 이처럼 따뜻한 기사의 이면에도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이 숨어 있다. 혼전순결을 경시하는 요즘의 풍토에서 점점 더 많은 미혼모가 나오고 있고, 이런저런 이유로 버려진 아이들을 누군가 맡아 키워야 할 필요성도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가치관 변화 연구를 보면 1979년에는 혼전순결을 꼭 지켜야 한다고 응답한 비율이 무려 88%였으나 2010년에는 20대의 67%가, 그리고 50대도 44%가 혼전순결을 꼭 지킬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관계를 쉽게 맺고 쉽게 끊는 인스턴트 관계 시대의 부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책임질 수 없는 아이를 낳아 놓고 그 끈을 놓아버리는,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마저 피상적이고 약한 유대관계의 연장선상에 놓여버린 것이다.
마음 따뜻한 사람이 많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신문에도 훈훈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야 한다. 실리를 숨긴 채 명분만 앞세우며 투쟁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가득 찬 신문을 계속 본다면 독자들도 점점 더 그 모습을 닮아 가기 쉽다. 물론 신문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투영하는 것이기에 사회가 밝아야 신문이 밝은 기사를 다룰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신문을 읽으며 그 영향을 받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 사회의 따뜻한 모습이 지면에 많이 보일 때 독자들도 신문을 읽으며 편안하게 웃을 수 있고 좋은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질 수 있을 것이다.
2013-12-18 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