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 추악한 ‘평화유지’와 시민의 열정/정서린 국제부 기자

[지금&여기] 추악한 ‘평화유지’와 시민의 열정/정서린 국제부 기자

입력 2011-09-03 00:00
수정 2011-09-03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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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린 국제부 기자
정서린 국제부 기자
이번 여름 국내의 한 시민단체를 따라 방글라데시에 다녀왔다. 방글라데시에서 이뤄지고 있는 한국 정부의 공적개발원조(ODA)의 효과를 살펴보자는 현장평가였다.

10일 남짓한 여정 가운데 오전·오후에는 현지 관계자들을 만나는 마라톤 인터뷰가 계속됐다. 새벽 1~2시까지는 낮에 한 인터뷰를 토대로 쟁점을 뽑고 남은 의문과 추가 질문을 정리하는 회의가 이어졌다. 동행 취재로 따라간 유일한 ‘아웃사이더’였지만 ‘의리상’ 하품을 참아가며 새벽 일정까지 함께했다.

다른 나라 국민들이 우리나라의 원조로 정말 혜택을 받고 있는지 궁금해 정성껏 준비한 질문을 밤새 이리저리 뜯어고치며 문제의식을 세심하게 다듬어 가는 그들의 열정은 새삼 기자를 반성하게 했다. 더 뜨끔했던 것은 시민단체 내부 인력뿐 아니라 일반인들이 직항편도 없는 방글라데시까지 직접 찾아와 힘을 보탠다는 사실이었다.

취업에 허덕이는 졸업반 대학생과 대학원생, 작은 무역회사를 다니는 회사원이 자기 돈을 들여 휴가를 내고 기말시험 공부도 반납한 채 개도국에 대한 원조 효과를 따져보는 데 몰두해 있었다.

오늘 외신들이 타전한 소식에 이 평범하고도 비범한 이들이 겹쳐졌다. 유엔 평화유지군이 10년간 내전을 겪고 있는 아프리카 서부 투레플루의 한 마을 소녀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재워주는 대가로 성관계를 가져왔다는 폭로였다. 세계 분쟁지역의 평화를 회복·유지하기 위해 유엔에서 파견한 평화유지군들이 이곳 주민들에게는 또 하나의 ‘가해자’였다.

유엔은 “지휘체계의 문제”라며 이를 시인했다. 달걀과 휴대전화를 소녀들의 성과 맞바꾸는 평화유지군, 당장의 생계가 급해 딸을 성폭행범에게 내모는 부모, 그리고 이 참담한 연결고리를 끊지 못하는 유엔. 가해자에 대한 조사와 처벌 과정은 숨기고 관련 홈페이지 개설과 주민 교육 정도를 피해 방지책이라며 내세우는 유엔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개도국 발전에 힘을 보태는 일반 시민들의 열정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

rin@seoul.co.kr
2011-09-03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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