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전세 유랑객] 서울서 수도권으로 밀려난 전세난민… 다음엔 또 어디로

[위기의 전세 유랑객] 서울서 수도권으로 밀려난 전세난민… 다음엔 또 어디로

입력 2012-09-29 00:00
수정 2012-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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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약 때마다 보증금 수천만원 올라”

서울 용산에 직장이 있는 조성태(37) 과장의 출근 시간은 오전 6시 30분. 경기 김포 장기동 전셋집에서 회사까지 승용차로 출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다. 퇴근 시간은 대략 오후 6시 30분~7시. 집에 도착하면 시계 바늘은 얼추 밤 9시를 가리킨다. 업무상 승용차를 탈 수밖에 없는 김씨는 출·퇴근에만 서너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셈이다. 조 과장이 앞서 전세를 살았던 강서구 공항동 아파트의 주인은 지난 3월 전세계약이 끝나자 보증금을 2억원에서 2억 5000만원으로 올렸다. 7000만원의 빚이 있던 조 과장은 결국 같은 보증금으로 전셋집을 찾다 보니 서울 밖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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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과장은 일단 위기를 넘겼지만 생활비가 더 들어간다. 직장이 멀어진 탓에 승용차 기름값 지출이 3배 가까이 많아졌다. 조 과장은 “한번 차를 끌고 나가면 기름값이 3만원쯤 드는 것 같다.”면서 “야근이나 회식을 하는 날은 택시비로 3만원이 나간다.”고 말했다. 그는 “귀가가 늦어지면서 늘어난 외식비까지 합치면 한 달 생활비로 30만원 이상 더 지출한다.”며 씁쓸해했다. 그는 “아내가 올해 둘째를 갖겠다던 계획을 포기했다.”며 한숨을 지었다.

경기 부천에서 서울 강남구 논현동으로 출근하는 이대용(37)씨는 전셋집이 2년마다 회사와 더 멀어졌다. 2007년 11월 동작구 사당동에서 1억 1000만원 전세로 신혼생활을 시작한 김씨는 2009년 구로구 아파트(전세 1억 4500만원)를 거쳐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1억 7500만원)로 옮겨 왔다. 돈을 모아도 시원찮은데 길에다 뿌리는 비용만 자꾸 늘고 있다. 이씨는 “부천도 전셋값이 오르고 있어 걱정”이라면서 “2년마다 이렇게 쫓겨다니느니 확 집을 사버릴까 생각도 들지만 아이들이 커가면서 드는 돈이 한두 푼이 아니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며 말했다.

한꺼번에 수천만원의 전세 보증금을 올려 줄 수 없는 서민들이 서울을 벗어나면 경제적 여건이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은 오판이다. 이들처럼 직장을 서울에 두고 장거리 출·퇴근을 하다 보면 피곤함은 그만두고 월 생활비가 40만~50만원은 더 들어간다. 출·퇴근을 맞추지 못해 일자리를 잃는 경우도 허다하다.

28일 ‘닥터아파트’에 따르면 2년 전 2억 2234만원이던 서울 평균 전셋값이 올해는 2억 6591만원으로 4357만원이나 올랐다. 월급쟁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전셋값 폭등으로 ‘전세 난민’이 증가했다는 것은 통계가 뒷받침한다. 2010년 1월 서울 시민은 1021만 3153명에서 지난달에 1006만 3258명으로 13만 8398명 감소했다. 반면 이 기간 경기 성남의 인구는 95만 3606명에서 97만 7243명, 고양은 92만 6283명에서 96만 3502명, 부천은 86만 5376명에서 87만 848명으로 늘었다.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고 있는 강경희(47·여)씨는 “지난해부터 마포와 서대문, 여의도에서 살던 사람들이 많이 옮겨 오고 있다.”면서 “2010년 1억 3000만원이면 구하던 85㎡ 아파트 전세가 요즘에는 1억 6000만~1억 6500만원까지 올랐다.”고 전했다.

수도권으로 옮긴 세입자들은 구직난에 직장을 옮기지 못하고 장거리 출·퇴근을 감수해야 한다. 서울시 산하 서울연구원에 따르면 15㎞ 이상 장거리 출·퇴근자가 강남권의 경우 2006년 31만 2717명에서 2010년 39만 5184명, 광화문 등 도심권은 25만 3762명에서 27만 515명으로 증가했다. 통상 거리가 15㎞가 넘어가면 출·퇴근에 1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수도 늘었다. 출근 시간대(오전 7~9시)에 경기도에서 서울 강남권으로 들어오는 사람의 수도 2006년 하루 19만 9988명에서 2010년 22만 7689명으로 2만 7000여명이나 증가했다. 이 시간대 경기도에서 광화문 등 도심권으로 들어오는 사람 수는 2006년 13만 7577명에서 2010년 14만 5917명으로, 여의도로 들어오는 사람은 1만 9769명에서 2만 4835명으로 증가했다.

윤혁력 서울연구원 교통시스템연구실장은 “경기에서 서울로 출근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전세 난민의 증가는 개인의 경제적 비용과 생활 불편의 증가는 물론 교통·환경문제 등으로 이어져 결국 국가·사회적 비용을 키우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지적했다.

무엇이 이런 현상을 낳았을까. 2010년 이후 서울 지역 집값 변동은 급격한 하락세를 그리고 있지만 전셋값은 급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집값에 비례해 전셋값이 움직이던 기존 주택시장 양상과는 사뭇 다르다. 집값 상승을 기대할 수 없다는 심리가 팽배해지면서 집을 사는 것보다 전세를 선호하는 세입자가 크게 증가하고, 전세의 ‘수요·공급 균형’이 깨지면서 보증금만 큰 폭으로 오르는 이상 현상이 널리 퍼진 탓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집주인은 집값이 떨어져 세입자를 구하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융자를 끼고 구입한 집값이 큰 폭으로 떨어져 보증금을 빼주지 못하는 ‘역(逆)전세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소형 아파트나 연립주택 중에는 설령 집을 처분하더라도 융자금을 상환하고 남은 돈으로는 보증금을 빼주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서울 구로구 신대방동 연립에 전세를 살고 있는 최재훈(38)씨는 전세 기간이 끝나고도 2년째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집주인이 너그러워서가 아니다. 세 들어 사는 집이 가격 하락으로 은행 융자금과 보증금을 빼주지 못하는 ‘깡통주택’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대출금과 전세보증금이 집값의 80%를 넘는 깡통주택이 전국적으로 18만 5000가구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전세를 옮길 생각을 못 하기는 세입자도 마찬가지다. 지난달 전국 평균 아파트 매매가 대비 전세보증금 비율(전세가율)은 61.7%까지 올랐다. 전체적으로 전셋값이 오르면서 ‘렌트 푸어’들은 어디로 이사 가도 부담되기는 마찬가지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차라리 보증금을 올려주고라도 기존 전셋집에 눌러 사는 세입자가 증가했다. 당장 전세보증금을 올려 주지 못할 경우 인상분만큼 월세를 내는 ‘반전세’도 유행하고 있다.

경제 사정 변화에 따라 집을 갈아 타는 이른바 ‘필터링 효과’가 사라지면서 전세 물건이 동이 나고 동맥경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문헌 중앙공인중개사 대표는 “가을 이사철임에도 도봉구 쌍문동 1800가구 단지의 월 이사 건수가 손에 꼽을 정도”라며 “전세가 실종되고 시장 기능이 마비돼 서민들만 두 번 울고 있다.”고 말했다.

여유 있는 집주인들의 얄팍한 심리도 전세난을 불러왔다. 낮은 금리가 계속되면서 전세를 월세로 돌리는 집주인이 늘어났다. 전세보증금을 받으면 금융소득이 연 3~4%에 불과하지만 월세로 돌리면 수익률은 두 배 이상 커진다. 월세는 전세보증금의 0.6~1% 금리를 적용해 받는다. 월세로 돌리면 수익률이 적어도 7% 이상 된다. 이래저래 무주택자들의 허리만 휘고 있는 것이다.

그럼 과연 대안은 없는가. 경기 성남 판교신도시 봇들마을에 살고 있는 신상수(49)씨. 신씨가 살고 있는 집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공급한 10년짜리 공공임대 아파트(59㎡)이다. 신씨를 만족시킨 것은 저렴한 보증금만이 아니다. 적어도 10년간 이사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는 게 큰 기쁨이다.

LH에 따르면 신씨의 임대 조건과 주변 일반 주택 임대료를 비교하면 공공임대 아파트 임대료가 얼마나 저렴한지 구분된다. 이 아파트는 임대보증금 5880만원에 월 임대료 40만원이다. 월 임대료는 법정 인상 범위에서 결정된다. 주변 전세 시세의 70% 선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2년마다 마음 졸여 가며 전셋집을 옮겨야 하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전세 난민’의 증가는 주거생활 불안은 물론 안정적인 직장 생활도 어렵게 한다. 특히 도심 일용직 근로자는 서울에서 수도권으로 쫓겨나면서 일자리까지 잃는 경우가 많아 자활을 어렵게 한다.

전문가들은 전세 난민을 막고 서민들의 주거안정을 위해서는 장기 공공임대주택 공급 확대가 해답이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전국의 임대주택은 총 145만 9513가구에 불과하다. 이 중 공공임대 아파트는 101만 9195가구이고, 10년 이상 장기임대주택은 91만 가구뿐이다. 장기 공공임대주택 확대의 걸림돌은 재원 확충이다. LH와 서울도시개발공사(SH)의 자금 사정이 여유롭지 않다. 단기간 대량 공급도 불가능하다. 또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갈 수 없는 차상위 계층에 대한 주거복지도 고민해야 한다.

남상오 주거복지연대 사무총장은 “서민들을 전세 난민으로 내몰지 않기 위해서는 공공임대주택 공급 확대가 시급하다.”며 “지금은 주택 문제를 경제적 논리, 공급만으로 해결하기보다 복지 차원으로 접근할 때”라고 말했다. 아울러 지방자치단체의 공공임대주택 공급 확대 인식 변화도 요구된다.

류찬희 선임기자·김동현기자

moses@seoul.co.kr

2012-09-29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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