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마다 반복되는 기업수금…“이참에 정경유착 끊자”

정권마다 반복되는 기업수금…“이참에 정경유착 끊자”

입력 2016-11-03 09:45
수정 2016-11-0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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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코스프레’ 기업도 자금 낸 대가로 이권·특혜 챙겨

박근혜 정부를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넣는데 방아쇠 역할을 한 미르와 K스포츠 재단 모금 사건을 계기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각종 명분을 내세워 기업들로부터 자금을 걷는 일은 정권마다 반복적으로 있어 왔다. 기업은 돈을 뜯기지만 그 대가로 이권이나 특혜를 챙기는 정경유착의 악습이 대한민국에서 수십 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이번에도 한국을 대표하는 19개 그룹의 53개 기업이 참여해 두 재단에 774억원을 냈다. 그룹당 적게는 수억 원에서 많게는 200억 원이 넘는 돈이 순식간에 걷혔다. 권력의 힘이 작용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대물림되고 있는 정경유착의 유산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강력한 제도적인 장치의 마련 외에 정부와 기업 모두 자성하고, 근본적인 변화를 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반복되는 기업수금 = 정권의 관심 사업에 기업 기부나 출연을 강제한 사례는 과거에도 수두룩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3년 아웅산 폭탄테러 유족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설립한 일해재단이 대표적이다. 이 재단은 3년간 대기업들로부터 598억 원을 걷었다.

그러나 1988년 5공 비리 청문회에서 정권 실세가 재단 출연을 강제했다는 기업인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재단의 실제 목적이 전 전 대통령의 퇴임 이후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각종 사업에 대기업 기부와 출연이 이어졌다.

더불어민주당에 따르면 기업들은 미르·K스포츠 재단에 출연한 774억 원 외에 청년희망펀드 880억 원, 지능정보기술연구원 210억 원, 한국인터넷광고재단 200억 원, 중소상공인희망재단 100억 원 등을 내놨다.

특히 청년희망펀드는 박 대통령이 1호 기부자로 나선 뒤 기업과 재벌 총수들의 기부가 줄지었다.

또 창조경제의 핵심 사업인 창조경제혁신센터 17곳 중 15곳에 대기업이 전담기업으로 참여해 투자금을 부담하면서 ‘할당’ 논란이 일었다.

업계에서는 이런 형태의 모금이 법적 근거가 없지만, 강제성을 띤 ‘준조세’라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대기업 255개사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기업의 40.3%는 사회공헌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으로 ‘외부의 선심성 지원 요구’를 꼽았다.

또 준조세 성격의 기부금 또는 외부협찬 요구 때문에 자체 사회공헌 사업을 추진할 예산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 돈 낸 기업들, ‘피해자’인가 ‘뇌물공여자’인가 = 기업들은 정권의 강압에 의해 자금을 뜯긴 피해자이기만 할까.

정치권 등과 연루된 금품수수 사건이 불거지면 기업들은 대체로 ‘피해자 코스프레’를 시도한다. 기업 이미지를 고려해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돈을 냈다는 등의 주장을 하다가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면 강압에 못 이겨 돈을 냈다며 ‘피해자 모드’로 들어간다.

이번 미르·K스포츠 재단 설립과 관련해서도 기업들은 애초 정부의 문화융성 정책 취지에 공감해 자발적으로 기금을 출연했다는 주장을 늘어놓다가 현재는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 등 청와대의 외압 탓에 어쩔 수 없이 돈을 냈다는 쪽으로 돌아서고 있다.

이와 관련, 법조계에서는 기본적으로 기업이 청와대 등 권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자’라는 점에서 이번 재단 설립과 관련해서는 피해자로 봐야 한다는 시각이 우세한 편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상 재단 설립을 먼저 제안 쪽이 안종범 전 수석이나 이승철 전경련 상근부회장이고, 청와대에 밉보이길 두려워한 기업들이 서둘러 기금을 끌어다 낸 모양새였다는 점에서 기업을 피해자로 보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국내 굴지의 로펌 소속 한 변호사는 “제3자 뇌물공여죄가 성립되려면 ‘부정한 청탁’이 있어야 한다. 기업이 특정한 사안에 대한 청탁을 목적으로 먼저 접근해 기금 납부한 것은 아닌 사안이기 때문에 기금 출연 기업을 모두 법적으로 문제 삼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단순히 모금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최순실 씨에게 직접 돈을 건넨 정황이 있거나, 검찰 수사 무마용 등 대가성이 있는 경우에는 다른 기업과 달리 봐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돼 주목된다.

검찰 출신 한 변호사는 “기업들이 강압이나 순수한 동기가 아닌 이권 또는 모종의 청탁 대가로 기금을 냈거나 최순실 씨 측에 별도의 돈을 전달했다면 뇌물공여자로 봐야 한다”며 “과연 기업을 피해자로만 봐야 하는지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 ‘악순환’ 근절책은 = ‘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이번에야말로 ‘정경유착’의 고리를 확실하게 끊어낼 강력한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2003년부터 이듬해 봄까지 이어진 대검 중수부의 불법대선자금 수사를 거쳐 2004년 정치자금법이 개정되자 과거 선거 때나 정권 출범에 맞춰 기업들을 상대로 노골적으로 강제 모금을 하던 관행은 사라졌다.

하지만 이후에도 기업들로부터 기부금 등의 명목으로 합법적으로 돈을 걷거나 자발성으로 포장한, 변형된 형태의 정치 모금이 또 다른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치자금법 개정에 버금가는 제도적인 방지책도입이 뒷받침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기업을 대하는 정부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무엇보다 정부에 집중된 권한을 조정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현재로써는 정부가 가진 기업에 대한 각종 ‘규제 권력’이나 대통령의 막강한 권한 때문에 기업들이 정부의 요구를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가 형성돼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내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정부가 가진 규제 등의 권한이 많으므로 기업들은 정부에 잘못 찍히면 손해가 크다고 생각해 정부가 요구하면 계속 돈을 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이어 “형평성에 안 맞는데도 대통령이 대기업을 사면하는 관행도 없어져야 한다”면서 “재벌들은 내부 거버넌스 문제나 불법 상속 등 약점이 있어서 정부에 끌려다니게 되는데 차제에 이런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기업 쪽에서도 지배구조 개선과 의사결정 투명화 등의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김상조 한성대 무역학과 교수는 “미르·K스포츠 재단에 돈을 낸 53개 기업 중 이사회 의결이나 투명경영위 등 하부위원회에 보고과정을 거친 곳은 4개뿐이다. 이는 바로 우리나라 기업의 지배구조가 아직 얼마나 후진적인지 잘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다”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해 미르와 K스포츠 재단의 강제 모금과 같은 위험요소를 관리할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정경유착 문제를 해결할 가장 실효성 있는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이밖에 정권의 강제 모금에는 협조하지 않겠다는 기업들의 선언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오고, ‘정권의 모금 창구’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는 전경련의 존폐 문제도 이번 일을 계기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지적도 끊이지 않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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